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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끝내 ‘박종철 고문치사’를 반성하지 않았다.

작성자 김성숙1
작성일 18-07-22 05:06 | 조회 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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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오늘, 1987년 1월 15일

‘탁’치니 ’억’ 경찰, 서울대생 박종철 군 쇼크사 거짓발표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숨진 5층 509호. 강민진 기자


31년 전 오늘, 1987년 1월 15일은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를 받다가 쇼크사로 숨졌다고 경찰이 거짓 발표한 날이다.

박종철은 숨지기 전날인 14일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치안본부에서 공안사건 관련 피의자로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 때문에 숨졌다.

이에 경찰은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언론에 박종철 사망 보도가 나가자 단순 쇼크사에 의한 사망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는 말과 함께 박종철을 부검한 결과 심장마비에 의한 사망이라고 밝혔다.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4층 박종철기념관에 전시된 박종철의 사망진단서. 당시 사망장소와 사인이 모두 미상으로 기록돼 있다. 강민진 기자


그러나 사건 당일인 14일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직접 시신 검안을 했던 오연상 내과의가 언론에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다”고 증언해 물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87년 1월19일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탁 치니 억 하며 쓰러져 숨졌다’는 내용의 수사결과 발표를 하고 있다. 그는 이듬해 1월 고문 은폐를 주도한 혐의로 결국 구속됐다. <한겨레>자료사진.


안본부는 ‘쇼크사’로 조작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사건 발생 닷새 만인 19일 “일부 경관의 지나친 직무 의욕으로 발생한 불상사”로 사건을 축소 발표했다.

당시 책임자 처벌도 조한경과 강진구 등 2명의 경관만을 구속 수감하는 데 그쳤다.

대중의 분노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임기 후반 의원내각제 개헌을 통해 권력의 연장을 꿈꿨던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민심을 조기에 수습하려 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사건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는 데만 급급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전두환이 남긴 ‘유체이탈 화법’을 통해 ‘국민 기만’을 시도한 기록들을 짚었다.

“박 군 사건 뼈아픈 교훈 삼아야” 유감 표명

경찰청은 거센 비판여론에 밀려 1987년 1월19일 ‘박종철군 치사사건’에 대한 자체 조사 결과 발표를 하고 고문 당사자로 조한경·강진규 경감을 지목했다. 경찰은 이날 구속영장이 발부된 두 경관의 얼굴을 숨기고자 똑같은 복장으로 위장한 경찰관 20명과 함께 서울 서대문구치소에 이감하는 촌극을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두환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지 엿새가 지난 1987년 1월 20일에야 처음으로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시한다.

하지만 이날 전두환의 입장 표명은 국가원수로서의 책임보다는 사건 윗선에 대한 보여주기 식 문책에 그쳤다.

아울러 전두환은 경관들의 자질 향상과 과학 수사를 지시하면서도, 체제 도전엔 강력히 대처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우리 경찰이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앞장서 보장하는 민주 경찰로 발전하는데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오던 터에 최근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 데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

비록 예외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이번 사건을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근본적인 예방을 위해서 경찰관의 자질과 교양을 높이고 과학적 수사능력을 보강하는데 분골쇄신해주기를 바란다 .

당면한 국가 대사의 완수를 위해서는 국법질서의 확립과 사회 안정이 그 전제가 된다.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나 용공 ·친북한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처하라 .


전두환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김종호 내무부 장관과 강민창 치안본부장 2명 만을 경질하는 것으로 문책인사를 마무리했다.

그 자리에는 정호용 전 육군참모총장과 이영창 서울시경국장을 임명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정계 소식통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의원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여당이 책임정치 풍토의 정착을 구현하기 위해 굳은 의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줬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

부의 사과와 후속 조처가 적절했다고 자화자찬하는 낯 뜨거운 행태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이 새로 임명한 인물들은 ‘책임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호용 신임 내무부 장관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육사 동기로, 1980년 5·18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대통령 최규하에게 광주 상황을 직접 보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전두환과 함께 광주 진압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기도 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뒤를 이은 이영창 서울시경국장 역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정권의 조직적 은폐에 적극 가담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치안본부장으로 임명된 이후 고문치사 사건의 책임자로 구속된 조한경과 강진구 2명의 경관에게 금품을 주며 회유하는 데 앞장섰다.

“국민 인권을 보호…”고문 방지 특별기구 상설

옛 남영동대공분실 전경. 지금은 경찰인권센터가 들어서 있다. 좁은 창문이 있는 5층이 조사실이다. 강민진 기자



고문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고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특별기구를 정부에 상설할 것을 검토하라 .


전두환은 유감 표명을 한 이튿날인 1월 21일 국민 인권보호를 위한 법적 제도적 방안을 연구하는 특별기구를 설치할 것을 지시했다.

전두환은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고문 방지 특별기구 상설 지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 발전시키고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을 신장시키려는 확고한 결의에 따른 것이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전두환은 88올림픽 개최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외국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 전두환의 “조속한 진실 공개와 법적 처리”, “정치 도의적 문책인사 단행”,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조처” 등으로 연이어 보여주기 식 발표를 했다.

그러자 미 국무부는 환영 논평을 발표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옹호했다.

미 국무부는 논평을 통해 “한국 경찰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관해 비극적인 사건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도록 한 전두환 대통령의 노력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 당국은 조사를 실시하고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으로 폭행 책임자들을 처벌하겠다는 훌륭한 결의를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경향신문> 1987년 2월 6일 치.


하지만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사건이 발생한 지 20여 일쯤 지난 2월 6일 유럽 5개국 순방길에 오른 노신영 국무총리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순방하는 나라마다 인권문제 등이 거론되면서 곤혹스러운 처지에 내몰렸다는 걸 알 수 있다.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조직적 은폐와 축소, 조작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전부 덮을 수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있는 대목이다.


박종철 49재와 전두환 취임 6년

한국경제가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룩 , 한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실현을 위한 조건이 성숙돼 행복감에 젖어있다 .

1987년 3월 3일은 박종철의 49재이자, 전두환 취임 6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전두환은 국민들의 분노는 철저히 외면한 채 6주년 소감을 밝혔고, 이 소감은 주한 외국 기자들을 통해 외국으로 퍼져갔다.

<경향신문>1987년 3월 3일 치, 1987년 3월 10일 치, 1987년 3월 5일 치, 1987년 3월 3일 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광고.


전두환은 또 재임 6년간의 주요 어록을 담은 <영광의 새 역사를 국민과 함께>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557쪽에 이르는 이 어록집 민정기편은 “정치는 모든 것의 상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저변입니다.

따라서 정치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것입니다 ?81년 1월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 “정치는 정치인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그 임무를 정치 밖의 무대로 넘겨버린다면 이는 국민에 대한 배임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82년 1월 국정연설” 등 주요 문장 2200개를 골라 자신의 재임 6년 동안의 공적을 스스로 치하하고 있다.

신문에는 전두환의 취임 6주년을 축하하는 대기업들의 광고가 줄지어 실리기도 했다.

1987년 3월3일 불교계 민주단체들로 구성된 ‘고 박종철 영가 49재 봉행준비위원회’ 주관으로 49재 행사가 열려 전국에서 모인 승려와 불자들이 서울 조계사로 행진하고 있다. 정부 압력에 밀려 부산 사리암에서 49재를 올리기로 한 총무원과 별도의 행사였다. <한겨레> 자료 사진.


반면 서울을 비롯한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는 박종철 49재와 고문 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렸다.

1987년 1월16일 임진강에서 박종철씨의 장례를 마치고 이튿날 새벽 부산 집에 도착한 박정기(맨 가운데)씨와 가족들은 어머니 정차순(오른쪽 셋째)씨가 다니던 인근 사리암에 아들의 영정을 모셨다. 3월3일 주지 백우 스님(맨 오른쪽)이 49재를 인도하고 있다. <한겨레>자료 사진.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경찰 저지병력을 사전 배치해 원천봉쇄작전에 나섰다.

그 결과 부산 사리암에서의 49재를 제외하고는 당초 계획했던 49재 및 평화대행진이 모두 무산됐다.

전두환은 49재 전날인 2일 밤부터 전국에 갑호 비상령을 내리고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 최종 집결지 및 행진 예상 코스에 경찰을 집중 배치했다.

이날 서울에 2만2000여명의 경찰력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6만 명의 경찰관이 동원됐다.

경찰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와 거리행진을 하는 시민들을 향해 사과탄을 던지며 시민들을 강제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 대열 속에 있던 신민당의 안동선 의원이 최루탄 가스에 질식해 쓰러지고, 김봉욱 의원은 최루탄에 맞아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날 전국적으로 439명이 연행되고 이 가운데 28명에 대해 구속 영장이 청구돼 16명은 구속 기소됐다.


개헌 유보 선언이 불러온 6.10항쟁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특별담화에서 호헌 조처를 발표했다.

개헌을 하지 않고, 현행 헌법에 따라 다음 대통령 선거인 13대 때도 12대 때와 같은 간선제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1988년 2월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사실상 자신이 지목한 후보를 통해 권력을 이어가겠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국민의 개헌과 민주화 요구는 철저히 묵살됐다.


사건의 내용이 왜곡되거나 은폐된 부분이 있다면 이는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실추시키는 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 정

확한 경위와 사실 내용 등을 사직당국이 엄중히 조사하여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히도록 해야 한다 .

전두환은 4·13 호헌조처를 발표한 지 한 달가량이 지난 5월 23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해 내각에 진실규명을 지시한다.

1987년 6월13일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명동성당을 점거한 채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이는 앞서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명동성당에서 5·18광주 민주화 운동 7주기 미사를 마친 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제목의 사제단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과 맞물려 호헌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전두환은 민심을 수습하려 또 유체이탈 화법을 꺼내 든 것이다.

전두환은 이날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서도 “당초부터 이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해서는 사건의 조속한 공개와 유감 표명, 관련자의 처벌, 관계 각료 문책, 그리고 인권보호위의 설치 등 일련의 단호한 조치를 취해왔으며 그러한 의지에 비추어볼 때 이 사건으로 다시 물의가 일어나게 된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라는 뜻도 표명했다.

아울러 정부 소식통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지금으로서는 우선 사건의 정확한 진상 파악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하기도 했다.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된 사실이 폭로된 이후 고문살인조작 범국민규탄대회가 열렸고, 중산층도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한 거리 시위. <한겨레>자료사진.


전두환의 잇따른 민심 수습용 발언에도 불구하고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6월 10일 전국적인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이날은 잠실체육관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이날 노태우가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반면 6월 10일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6월 29까지 19일 동안이나 지속됐다.

이로 인해 노태우는 전두환에게 한국의 민주화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내용의 개헌안을 수용할 것을 건의하고, 전두환은 이를 받아들여 6·29 선언을 발표한다.

<동아일보> 1987년 9월 21일 치, 박처원 치안감 <한겨레> 자료사진.


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조작한 박처원 등 치안본부 간부 3명은 9월 21일 모두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의 범행사실은 모두 유죄로 인정되나, 피고인들이 경찰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바지한 국가에 대한 공로 등을 참작했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들은 법정에서까지 범행사실을 계속 부인하며 끝까지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약속 지킨 대통령에 보람…” 전두환 고별 회견

5공화국의 긍정적인 측면의 성취는 그 어떤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민주발전의 밑거름이며 귀중한 자산 (중략 )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단임을 실천해야만 새롭게 시작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약속해왔다 . 내가 약속을 지킨 대통령이 되었다는 데 대해서 가장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경향신문> 1988년 2월 20일 치.


전두환은 끝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두환은 이듬해인 1988년 2월 20일 고별 회견을 통해 자신의 7년 재임 기간을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발언을 했다.

전두환은 이날 ‘1년이라도 더 집권하는 것이 어떠냐’하는 유혹을 뿌리쳤던 사실을 강조하면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인물로 국민 여러분이 기억해줬으면 감사하겠다”고 덧붙였다.

참고 문헌

<박종철> 김윤영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을 기억하다>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6월항쟁> 서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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