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청원서'로 만든 짚신 신고 파리로 향한 사람
작성자 EOxmMuN91
작성일 19-06-0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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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 위해 힘썼던 김창숙 선생...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
[오마이뉴스 황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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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 김창숙(1879~ 1962) 경상북도 성주 출생, 유학자, 독립운동가, 민주화 운동가 |
ⓒ 심산 김창숙선생 기념사업회 |
100년 전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많은 사람이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머나먼 중국 상하이로 몰려왔다. 그중 혁신유림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임시정부에 참여한 사람이 심산 김창숙 선생이다.
'심산' 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굳은 마음, 삶으로 보여준 김창숙 선생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유림대표가 빠진 것에 크게 실망한 김창숙은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의 의지를 담은 파리장서를 작성해 파리강화회의에 전달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김창숙은 파리장서와 서명자 명단으로 미투리(삼이나 노 따위로 짚신처럼 삼은 신)를 만들어 신고 국경을 넘었다. 파리로 향하던 김창숙은 상하이에서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상의한 끝에 파리에 민족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에게 영어로 번역된 파리장서를 전달한 후 중국에 남아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다.
이후 파리장서는 수천 부 인쇄돼 중국의 정계, 언론계, 각국 외교공관, 국내 지방 향교 등에 배포됐다. 당황한 일제는 유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는데 이 일이 '1차 유림단의거'이다. 이 일로 500여 명이 체포됐고 곽종석, 김복한 등 18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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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일시적으로 굴복한 것은 일본의 위협과 압박을 받아서 임시방편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 속마음은 앞으로 천만년이 지나도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중략)...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차라리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더라도, 맹세코 일본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2천만의 우리들만이 오직 천지가 길러주는 은혜를 받지 못해 화합의 기운을 한탄만 하겠습니까? 여러 나라 대표님들은 헤아려 주십시오' - 파리 장서 주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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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숙 선생(사진 왼쪽)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당시 모습(1925) |
ⓒ 심산 김창숙선생 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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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임시정부 간 협력관계에 중추적 역할 담당
김창숙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임시의정원이 구성되자 경상북도의원을 거쳐 1927년에는 임시의정원 부의장을 지낸다. 유학과 한문에 능통했던 김창숙 선생은 중국의 정치 지도자, 학계·언론계 인사 및 외교관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여러 편의를 이끌어 냈다. 특히 중국 손문과 단독회견을 통해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심산은 우당 이회영과 함께 새로운 독립기지 건설을 위해 국내로 잠입해 모금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에 발각돼 600여 명의 유림이 구속됐다. 이것이 '2차 유림단 의거'이다.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수 명의 일인을 사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위해 무기와 자금을 건넨 이도 심산 김창숙 선생이었다.
1927년 조선인 첩자의 신고로 구속된 심산은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결코,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지 않는다"며 변론을 거부했다.
옥중에서는 전옥의 명령을 거부했고 변절한 최남선의 <일선융화론> 읽기를 강요한 간수를 향해서는 이 책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옥중 투쟁과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된 심산은 병세가 위중해 1934년 가출옥됐지만 1945년 8월 초 건국동맹 결성이 노출돼 또다시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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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79세) 김창숙 선생의 손자 포천출장안마 김창숙 선생의 광복 후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월 9일 심산기념관) |
ⓒ 황상윤 |
통일운동과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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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은 해방 후 민족의 분열과 분단의 조짐을 외면할 수 없어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 등과 함께 이른바 '7거두 공동성명'을 발표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김창숙 선생은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도 정면으로 맞섰다. 이 대통령 하야 경고문, 부산 피난지에서의 국제구락부 사건 주동, 이승만 삼선 취임 반대, 보안법 개악 반대, 민권쟁취 구국운동 등으로 해방된 조국에서도 탄압과 옥고를 반복해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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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백범 김구 선생 11주기 추도식'이 효창원 공원에서 열렸다. 김구 선생이 암살된 후 처음으로 열린 공식 추도식에서 김창숙 선생은 '백범 선생 살해 진상규명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김구 암살의 배후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다.
심산은 교육사업을 민족운동의 하나로 보고 성균관대학의 설립,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후학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을 조국 독립과 반독재 투쟁, 통일 운동,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그였지만 숨을 거둘 때 변변한 집 한 칸 없었다.
심산의 손자 김창(79세)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할아버지는 혼자서는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업고 다녔어요. 옆에서 본 할아버지는 단 한 번도 신념을 꺾거나 바꾸지 않았어요.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유학자로서 의리와 대의명분을 삶 속에서 실천한 강직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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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산 김창숙기념관 재개관식 3월 29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위치한 심산 김창숙기념관이 재개관했다. 김창숙선생 손자 김위 옹(오른쪽 첫번째) ,심산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김창환 회장(왼쪽 여섯번째),서울남부보훈지청 이용기 지청장(왼쪽 네번째) LG하우시스 민경집 대표(왼쪽 일곱번째),김안숙 서초구의원(왼쪽 세번째) |
ⓒ 심산 김창숙선생 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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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선생은 1962년 김구· 안창호· 윤봉길· 안중근 등과 함께 건국훈장 중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2011년에는 심산 김창숙기념관을 서초구에 개관했으며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3월 29일 리모델링을 통해 재개관했다. 이곳에서는 심산의 정신과 발자취를 만날 수 있다.
광복의 기쁨보다 분단된 조국을 가슴 아파했던 심산 김창숙. 우연인지 필연인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하는 4월 11일,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린다. 잠시 꺾인 한반도 평화의 물줄기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다시 흘러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통일은 어느 때에
-김창숙-
조국 광복에 바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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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뜻한 일 이미
어긋나 실패하고
몹쓸 병만 부질없이
오래가네
...중략...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는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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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초타임즈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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